유토피아(Utopia)는 1516년에 토마스 모어가 펴낸 책으로, 이 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좋은 세상’ 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초승달 모양의 섬 유토피아에는 같은 말과 비슷한 풍습, 제도, 법률을 가진 54개의 마을이 있다. 그곳의 시민들에게는 빈곤도 없고 사치나 낭비도 없다. 이 섬의 성인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생산적 노동에 종사한다. 시민이면 누구나 각기 특수한 기술을 배워서 농부, 직조공, 석공, 철공 또는 목공이 된다. 한 가지 기술을 충분히 익히고 난 다음에는 본인이 원하면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본인의 기호에 따라 어느 기술에나 종사할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는데,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고 두 시간 휴식을 취한 후에 세 시간 일한다. 잠자고 남은 시간은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을 일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집집마다 열쇠를 채우거나 빗장을 거는 일도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집 안에 들어간들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의 시민들은 10년마다 제비를 뽑아 집을 교환할 수 있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규율사회의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이런 부정성에서 점점 더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Yes, we can.”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며,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노동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성과사회는 우울증, 소진증후군 등 사회병리 현상을 가져오며, 이런 점에서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규율 단계를 마치고 규율로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가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 원인을 분석하며, 개신교의 직업 윤리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달에 기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을 인류 최초의 죄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보지 않고, 직업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즉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신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강조한 금욕주의는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생활 윤리를 가리키며,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세에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생활을 멀리하면서 최대한 많은 시간 동안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절제된 생활과 성실한 노동을 통해 얻은 사적인 이윤이 결국 신의 뜻이라는 인식이 ㉡근대사회의 노동윤리로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인해 사람들은 기업경영과 상거래를 통한 이윤 추구를 탐욕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신의 소명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AI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소멸을 예견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노동력을 98%이상 컴퓨터, 인터넷, 로봇이 대신하는 시대, 즉 ‘인간 없는 노동’ 시대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혹은 소외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될 인간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긴 노동, 이전보다 많아진 여분의 시간 등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생계 수단일 뿐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원천으로 이해한 노동 그리고 남는 시간의 사용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은 예술과 창조적 활동, 지식의 재창조 등으로 개인 삶의 질을 높일 수도 있고, 권태와 무기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유토피아(Utopia)는 1516년에 토마스 모어가 펴낸 책으로, 이 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좋은 세상’ 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초승달 모양의 섬 유토피아에는 같은 말과 비슷한 풍습, 제도, 법률을 가진 54개의 마을이 있다. 그곳의 시민들에게는 빈곤도 없고 사치나 낭비도 없다. 이 섬의 성인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생산적 노동에 종사한다. 시민이면 누구나 각기 특수한 기술을 배워서 농부, 직조공, 석공, 철공 또는 목공이 된다. 한 가지 기술을 충분히 익히고 난 다음에는 본인이 원하면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본인의 기호에 따라 어느 기술에나 종사할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는데,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고 두 시간 휴식을 취한 후에 세 시간 일한다. 잠자고 남은 시간은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을 일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집집마다 열쇠를 채우거나 빗장을 거는 일도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집 안에 들어간들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의 시민들은 10년마다 제비를 뽑아 집을 교환할 수 있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규율사회의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이런 부정성에서 점점 더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Yes, we can.”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며,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노동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성과사회는 우울증, 소진증후군 등 사회병리 현상을 가져오며, 이런 점에서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규율 단계를 마치고 규율로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가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 원인을 분석하며, 개신교의 직업 윤리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달에 기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을 인류 최초의 죄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보지 않고, 직업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즉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신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강조한 금욕주의는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생활 윤리를 가리키며,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세에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생활을 멀리하면서 최대한 많은 시간 동안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절제된 생활과 성실한 노동을 통해 얻은 사적인 이윤이 결국 신의 뜻이라는 인식이 ㉡근대사회의 노동윤리로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인해 사람들은 기업경영과 상거래를 통한 이윤 추구를 탐욕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신의 소명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AI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소멸을 예견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노동력을 98%이상 컴퓨터, 인터넷, 로봇이 대신하는 시대, 즉 ‘인간 없는 노동’ 시대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혹은 소외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될 인간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긴 노동, 이전보다 많아진 여분의 시간 등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생계 수단일 뿐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원천으로 이해한 노동 그리고 남는 시간의 사용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은 예술과 창조적 활동, 지식의 재창조 등으로 개인 삶의 질을 높일 수도 있고, 권태와 무기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유토피아(Utopia)는 1516년에 토마스 모어가 펴낸 책으로, 이 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좋은 세상’ 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초승달 모양의 섬 유토피아에는 같은 말과 비슷한 풍습, 제도, 법률을 가진 54개의 마을이 있다. 그곳의 시민들에게는 빈곤도 없고 사치나 낭비도 없다. 이 섬의 성인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생산적 노동에 종사한다. 시민이면 누구나 각기 특수한 기술을 배워서 농부, 직조공, 석공, 철공 또는 목공이 된다. 한 가지 기술을 충분히 익히고 난 다음에는 본인이 원하면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본인의 기호에 따라 어느 기술에나 종사할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는데,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고 두 시간 휴식을 취한 후에 세 시간 일한다. 잠자고 남은 시간은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을 일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집집마다 열쇠를 채우거나 빗장을 거는 일도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집 안에 들어간들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의 시민들은 10년마다 제비를 뽑아 집을 교환할 수 있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규율사회의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이런 부정성에서 점점 더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Yes, we can.”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며,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노동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성과사회는 우울증, 소진증후군 등 사회병리 현상을 가져오며, 이런 점에서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규율 단계를 마치고 규율로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가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 원인을 분석하며, 개신교의 직업 윤리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달에 기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을 인류 최초의 죄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보지 않고, 직업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즉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신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강조한 금욕주의는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생활 윤리를 가리키며,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세에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생활을 멀리하면서 최대한 많은 시간 동안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절제된 생활과 성실한 노동을 통해 얻은 사적인 이윤이 결국 신의 뜻이라는 인식이 ㉡근대사회의 노동윤리로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인해 사람들은 기업경영과 상거래를 통한 이윤 추구를 탐욕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신의 소명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되었다.
세 제시문을 따로 소개하면 비교가 아닙니다. 노동의 목적과 결과라는 두 축을 세워 표처럼 맞대어야 합니다. (나)의 결과(우울증·소진증후군 같은 사회병리)와 (가)(다)의 긍정적 결과가 다르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규율사회의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이런 부정성에서 점점 더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Yes, we can.”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며,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노동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성과사회는 우울증, 소진증후군 등 사회병리 현상을 가져오며, 이런 점에서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규율 단계를 마치고 규율로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가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 원인을 분석하며, 개신교의 직업 윤리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달에 기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을 인류 최초의 죄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보지 않고, 직업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즉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신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강조한 금욕주의는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생활 윤리를 가리키며,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세에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생활을 멀리하면서 최대한 많은 시간 동안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절제된 생활과 성실한 노동을 통해 얻은 사적인 이윤이 결국 신의 뜻이라는 인식이 ㉡근대사회의 노동윤리로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인해 사람들은 기업경영과 상거래를 통한 이윤 추구를 탐욕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신의 소명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AI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소멸을 예견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노동력을 98%이상 컴퓨터, 인터넷, 로봇이 대신하는 시대, 즉 ‘인간 없는 노동’ 시대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혹은 소외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될 인간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긴 노동, 이전보다 많아진 여분의 시간 등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생계 수단일 뿐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원천으로 이해한 노동 그리고 남는 시간의 사용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은 예술과 창조적 활동, 지식의 재창조 등으로 개인 삶의 질을 높일 수도 있고, 권태와 무기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한쪽 평가만 하면 불완전합니다. (나)에서는 노동 강박에서의 해방감과 생산성이라는 목적 상실의 불안을, (다)에서는 생활 윤리로서의 노동 부재로 인한 정체성 혼란과 소명 확신의 부재를 각각 평가해야 합니다.
유토피아(Utopia)는 1516년에 토마스 모어가 펴낸 책으로, 이 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좋은 세상’ 이라는 의미의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초승달 모양의 섬 유토피아에는 같은 말과 비슷한 풍습, 제도, 법률을 가진 54개의 마을이 있다. 그곳의 시민들에게는 빈곤도 없고 사치나 낭비도 없다. 이 섬의 성인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생산적 노동에 종사한다. 시민이면 누구나 각기 특수한 기술을 배워서 농부, 직조공, 석공, 철공 또는 목공이 된다. 한 가지 기술을 충분히 익히고 난 다음에는 본인이 원하면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본인의 기호에 따라 어느 기술에나 종사할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는데,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고 두 시간 휴식을 취한 후에 세 시간 일한다. 잠자고 남은 시간은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하루에 여섯 시간을 일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집집마다 열쇠를 채우거나 빗장을 거는 일도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집 안에 들어간들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의 시민들은 10년마다 제비를 뽑아 집을 교환할 수 있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규율사회의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이런 부정성에서 점점 더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Yes, we can.”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며,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노동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성과사회는 우울증, 소진증후군 등 사회병리 현상을 가져오며, 이런 점에서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규율 단계를 마치고 규율로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가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 원인을 분석하며, 개신교의 직업 윤리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달에 기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을 인류 최초의 죄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보지 않고, 직업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즉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신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강조한 금욕주의는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생활 윤리를 가리키며,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세에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생활을 멀리하면서 최대한 많은 시간 동안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절제된 생활과 성실한 노동을 통해 얻은 사적인 이윤이 결국 신의 뜻이라는 인식이 ㉡근대사회의 노동윤리로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인해 사람들은 기업경영과 상거래를 통한 이윤 추구를 탐욕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신의 소명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AI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소멸을 예견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노동력을 98%이상 컴퓨터, 인터넷, 로봇이 대신하는 시대, 즉 ‘인간 없는 노동’ 시대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혹은 소외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될 인간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긴 노동, 이전보다 많아진 여분의 시간 등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생계 수단일 뿐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원천으로 이해한 노동 그리고 남는 시간의 사용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가령 인간은 예술과 창조적 활동, 지식의 재창조 등으로 개인 삶의 질을 높일 수도 있고, 권태와 무기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세 사회를 각각 비판하되 같은 기준((가)의 노동의 필요성·강도·규칙성)으로 해야 합니다. ㉠㉡은 지나친 노동, ㉢은 노동의 결핍이라는 양 극단을 짚으세요.